(웹이코노미) 공주시와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의 1~4호분 발굴 재조사 성과를 17일 공개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백제가 공주에 도읍한 475년부터 538년까지 재위한 웅진기 왕들의 묘역으로, 이번에 조사한 1~4호분은 무령왕릉 묘역과 구분되어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 묘역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도굴된 상태로 한 차례 조사가 있었으며, 지난해 7월부터 재조사가 진행됐다.
주요 성과를 살펴보면, 먼저 한성기에서 웅진기로 이어지는 백제 왕실의 돌방무덤 구조와 묘역 조성 과정을 확인했다.
묘역은 사전 계획에 따라 경사면을 깎아내서 완만하게 조정한 다음, 가장 동쪽에 위치한 1호분부터 4호분 순서로 조성된다.
돌방은 지하에 만들어지며 천장돌을 1매만 사용하는 궁륭식 구조이다.
내부 벽면에는 모두 석회를 발랐고, 바닥에는 30㎝ 두께로 강 자갈을 채워 넣었다.
둘째, 2호분 출토 귀걸이와 각종 금공예품을 통해 웅진 초기에도 백제의 대내외 정치시스템이 굳건히 유지됐음을 확인했다.
귀걸이는 중간에 청색 유리옥 장식이 추가되어 있다.
한성기와 무령왕릉 왕비 귀걸이의 중간 형태로서 2호분에 묻힌 왕이 웅진 초기에 재위한 사실을 알려준다.
당시에도 백제 왕실이 높은 수준의 금세공기술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반지는 은에 금을 도금한 것으로 줄무늬가 새겨져 있다.
동일 형태가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도 있어서 웅진 초기 백제와 신라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칼 손잡이 고리 장식은 철에 은을 씌워 장식한 오각형 형태이다.
나주와 논산에서도 동일한 장식칼이 있다.
당시 백제가 지방 수장층에게 하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셋째, 웅진 도읍 초기에도 대외 교역망이 잘 유지되고 있었다. 여러 종류의 유리 옥 1,000여 점이 수습됐다.
이 중 황색과 녹색 구슬에 사용된 납 성분은 무령왕릉과 동일하게 산지가 태국으로 분석됐다.
당시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교역망을 운영했던 것이다.
넷째, 2호분의 주인공이 15세에 세상을 떠난 삼근왕(23대, 477~479)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귀걸이와 함께 출토된 어금니 2점의 법의학 분석 결과, 해당 인물이 10대 중후반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4호분에 묻힌 인물들은 개로왕의 직계인 문주왕과 삼근왕을 비롯하여 혈연 관계에 있는 왕족들로 추정된다.
즉, 정치적 혼란기로만 인식됐던 백제 웅진기 전반에도 내부 정치 시스템과 대외 교역 잘 유지됐던 것이다.
이를 발판으로 무령왕은 ‘다시 강국이 됐음(更爲强國)’을 선언할 수 있었고, 성왕은 사비로 천도하여 한층 성숙한 문화를 완성한 것이다.
최원철 시장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백제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유적”이라며, “국가유산청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와 함께 지속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왕릉원 내 잊혀진 고분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및 백제왕도 핵심 유적으로서의 진정성 및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기자간담회는 서울 한국의집 민속극장에서 진행됐으며, 6월 18일과 19일 무령왕릉과 왕릉원 모형전시관에서 오전 9시부터 접수를 받고 11시부터 현장 설명회가 진행된다.
인원이 많을 경우 20여명씩 순차적으로 진행하며 우천 시 취소될 수 있으니, 자세한 사항은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로 문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