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웹이코노미 문화기획 ] 안재영 객원문화대기자 = 웬만한 화가라면 황주리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필자도 별로 할말이 없어진다. 필자는 화가 황주리, 그녀의 ‘예술가에 대한 명상’을 물색없이 나름대로 풀어본다. 황주리가 화가가 된 건 어머니 때문이다. 유난히 말이 없는 딸이 걱정되던 어머니가 다섯 살 되던 무렵 어린 주리의 손을 잡고 동네 미술학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날부터 주리는 매일 그림을 그리는 어린 화가가 되었다. 세상과의 끈을 연결해 준 게 그림이었다. 주리는 늘 그걸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육십이 훌쩍 넘어 장하게도 아직도 화가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은 주리는 가끔 잘한 일일까 하는 마음을 갖고 산다.
주리는 일단 살아온 나날만큼 매일매일 그려온 삶의 흔적들이 쌓이고 쌓여, 짐을 잔뜩 등에 지고 내려놓을 곳도 없는 속수무책의 낙타가 된 기분이다. 하긴 낙타가 아닌 존재가 어디 있으랴. 글만 쓰는 사람이 될 걸 그랬다. 평생 무명으로 소설을 쓰다가 죽어서 유명해진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나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처럼 되는 꿈을 지니고 살아도 정말 나쁘지 않을 것이다.
주리는 언젠가 대구 근대골목에서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 구절을 만나면서, 시 한 구절의 강력한 힘을 느낀 기억이 있다. 또, 음악처럼 가볍고 오래 멀리 가는 게 또 있을까? 아니 모든 인생이 그렇듯, 남의 떡이 커 보이는지도 모른다. 사실 모든 예술은 표현 매체가 다를 뿐 하나다. 슈만이 정신병원 체류 시절 썼던 악보는 그림이다. 클레의 그림을 닮은 악보가 그림이 아닐 이유가 있을까? 본인 외에는 아무도 해독을 못할 뿐이다. 천재라 불리는 예전의 화가들은 요절하는 바람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의 작가들이 백 세 이상 살면서 작업을 한다면 이 작품들은 다 어디로 갈 것인가? 쓰레기가 되든지, 어딘가에서 숨죽이며 썩지도 못하고 쌓여있든지, 소위 비싼 작품값을 상징하는 명품으로 남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사 모든 게 운이다. 세상의 불공평함은 작가들 사후에도 계속 존재한다. 솔직히 말해서 어느 때인가 그림이 막 팔리던 시절도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그림이 좋아서가 아니라 값이 오를 거라는 기대감으로 그림을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주리는 늘 가늘고 길게 끝까지 살아남는 작가가 되는 꿈을 꾼다. 어느 시인은 시인이 된 걸 후회한다지만, 지금 이 시대, 가장 낡은 매체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된 걸 후회한다. 아니 후회하지 못한다. 할 수 없다. 후회하기는 너무 늦었다. 그냥 가자. 뚜벅뚜벅.
<화가 황주리는 누구? = 황주리 작가는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다. 이화여대 미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홍익대학원 미학과와 뉴욕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갤러리 현대(서울), 노화랑(서울), 가나아트 부산(부산), 워싱턴 스퀘어 윈도우즈 갤러리(뉴욕,) 아트 프로젝스 인터내셔널(뉴욕) 등에서 40회의 개인전을 개최했고, 제5회 ‘한국비평가협회상’과 제14회 ‘선 매거진 상’을 수상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여러 곳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