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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E공간] 장소의 정치학 '전사자 숭배'

국가라는 종교의 희생제물..."1차대전, 전사자 숭배의 정점"

[웹이코노미 김상호 기자] 전쟁 경험의 신화화 '전사자 숭배'는 내셔널리즘의 핵심 장식물이다. 전장에서 죽은 병사들을 국가와 민족의 영웅으로 기리는 문화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그것은 자연스러운 애도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국가 권력의 은밀한 메커니즘이 작동한 것일까? ‘전사자 숭배’는 근대에 탄생한 시민종교인 내셔널리즘의 핵심 장치다. 유례없는 대량살상의 전쟁이었던 1차대전은 이런 전사자 숭배의 정점이었다. 죽음의 실상을 은폐하고 초월하기 위해 전쟁 경험과 전사(戰死)는 신성시되고 이상화되고 낭만화되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전쟁 경험의 잔혹한 실상은 ‘전쟁 경험의 신화’로 변형되었다. 기원과 토대: 의용병과 신화의 재료들 전사자 숭배와 전쟁 경험 신화의 기원은 최초의 근대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의용병들이다. 근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프랑스 혁명전쟁(1792~1799)과 독일의 대 나폴레옹 해방전쟁(1813~1814)은 과거의 전쟁들과 성격이 달랐다. 그전까지 전쟁은 어디까지나 왕실의 전쟁으로서 인민의 이해와는 거의 무관했다. 군대는 귀족과 용병, 징집병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전쟁에서는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나선 ‘시민군’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훗날 프랑스의 국가(國歌)가 되는 '라 마르세예즈'는 마르세유 출신 의용병들이 부르던 노래였다. 독일의 해방전쟁 때도 시인과 저술가 등 식자층까지 의용병으로 나서 국민의식을 고취시켰다. 당시 유명한 시인 의용병으로 뤼초 자유군단에서 활약하다 전사한 테오도어 쾨르너는 해방전쟁에 참여한 의용병을 '국왕과는 상관없는 민중의 십자군'이라 칭했다. 실제 의용병 가운데 교양 있는 중간계급 출신이 다수는 아니었지만, 그들 식자층이 남긴 글과 시는 전쟁을 신성한 경험으로 승화시켰다. 시민 의용병의 출현은 일반 병사들의 지위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부터 군사 묘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전까지 죽은 병사들에겐 제대로 된 무덤조차 제공되지 않았었다. 전사자들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후세대들의 경배 장소가 될 군사 묘지의 조성과 각종 전사자 기념물의 제작에는 서구의 전통적 상징체계가 총동원되었다. 가령 병사의 삶과 죽음을 신성화하는 데 그리스도교의 상징성과 의식을 끌어들였고, 전사자 묘지와 기념물을 장식하는 데 고대 그리스·로마의 모티프와 도상이 활용되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전쟁 경험의 신화를 구축하는 재료들이었다. 발전과 변용: 1차대전과 전쟁 묘지 1차대전 시기는 전쟁 경험 신화의 절정이자 확립기였다. 이른바 ‘1914년 세대’라 불리는 수많은 청년들이 국가를 위해 자원입대했다. 1차대전은 유례없는 대량살상의 전쟁이었다. 약 1,300만 명이 죽은 1차대전의 전사자 수는 1790년부터 1914년 사이에 벌어진 큰 전쟁들의 전체 사망자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또한 서부전선에서 교착상태 속에 벌어진 장기간의 ‘참호전’은 전쟁에 대한 인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죽음은 일상적으로 존재했고, 죽음의 공포가 극에 달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 병사들 사이에 ‘전우애’가 싹텄다. 당시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작가 에른스트 윙거는 그 전쟁의 공포 속에서 강철 같은 영혼의 인간인 ‘새로운 인종’의 탄생을 보았다. 그는 집단주의와 전우애, 남성성으로 대변되는 전쟁 경험을 찬미했다. 이런 식의 신화화는 죽음의 실상을 은폐하고 초월하며, 남자다움을 이상화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막대한 전사자가 발생한 만큼 묘지 조성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국가는 그 많은 죽음이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싸우다 맞은 고귀하고 영웅적인 죽음이라고 선전할 필요가 있었다. 수많은 전사자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또다른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가도록 독려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국가를 위한 죽음은 숭고한 죽음이어야 했기에 전사자 숭배와 전쟁 경험의 신화화는 더욱 강도 높게 진행되었다. 각국은 앞다투어 전사자들만을 위한 전쟁 묘지를 건설했다. 독일의 ‘영웅의 숲’, 프랑스의 ‘장례 정원’ 등은 숲이나 정원의 형태로 묘지를 꾸밈으로써 죽음을 자연 안에서 맞이하는 영원한 잠으로 각인시켰다. 자연을 이용하여 죽음의 독소를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거기에 그리스도교와 고대 그리스·로마의 모티프들이 동원되어 영웅적 죽음과 구원의 희망을 상징화했다. 죽음의 참혹한 실상을 은폐하는 데는 전쟁을 일상생활의 물건과 전투 현장 관광 등에 결부시키는 ‘사소화(trivialization)’ 경향도 한몫했다. 사소화는 전쟁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시시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변용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당시 제작된 수많은 그림엽서에는 진짜 시체나 고통스러워하는 부상자의 모습이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장미 화단에 놓인 기관포, 참호 안에서 맥주 파티를 벌이는 병사들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기만적인 이미지들을 담고 있었다. "전쟁의 사소화 과정은 전쟁의 실상을 (초월하지는 못해도) 위장하고 통제하는 또다른 방법이었고, 그로써 전쟁 경험의 신화를 뒷받침했다. 사소화는 전쟁을 찬양하고 미화하는 대신, 익숙한 것으로,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선택하고 지배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전쟁에 대처하는 방법이었다" 1차대전 전시와 전후에 문진으로 쓰인 포탄이라든가 잠수함 모양의 하모니카가 등장했다. 1916년 독일에서 열린 '전쟁, 민족 그리고 예술'이라는 전시회 카탈로그에는 철십자 훈장이 들어간 바늘방석, 성냥갑 따위와 참호가 그려진 담뱃갑 등이 소개됐다. 파리 봉마르셰 백화점의 1919년 광고에는 두 소녀가 ‘독일산’이란 딱지가 붙은 봉제인형을 밟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1차대전 후에는 편리해진 교통수단에 힘입어 전투 현장이나 군사 묘지를 둘러보는 관광 상품이 인기를 얻기도 했다. 결과와 영향: 파시즘과 정치의 야만화 전사자 숭배와 전쟁 경험의 신화화를 통한 내셔널리즘 강화는 1차대전 이후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이제 전쟁은 국가와 개인의 재생 수단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전시의 태도들은 평시로까지 이어지며 정치의 야만화, 인명에 대한 심각한 무관심을 촉진했다. 남자다움과 전우애라는 이상은 유럽 전역에서 극우 이데올로기의 필수 성분으로 흡수된다. 전사자 숭배를 정치적으로 십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좌파가 아니라 우파였다. "우파는 독일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전쟁 경험의 상속자를 자임했고, 야만화 과정은 이 세력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전후 독일에서는 이 영향력이 정치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으니,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내내 다른 모든 정치 집단은 언제나 우파의 의제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만 했다" 전쟁 경험과 전우애, 남자다움이 촉진한 정치의 야만화는 우파의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대중정치의 속성을 재빨리 간파한 우파는 신화와 상징을 정치적 도구화하여 ‘대중’을 ‘국민화’시킬 수 있었다. 1차대전은 전후 대중정치 시대가 열리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의용병의 역사는 1차대전 이후에도 에스퍄냐 내전을 거쳐 2차대전까지 계속 이어진다. 에스파냐 내전은 전쟁 경험 신화의 전통을 새롭게 부활시켰다. 그 주역은 에스파냐 병사들이 아니라 파시스트 세력에 맞서 공화국 정부를 지키기 위해 각국에서 몰려든 의용병(국제여단)이었다. 19세기에 영국 시인 바이런이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했다가 죽음으로써 전쟁 경험을 낭만화하는 데 일조했듯, 에스파냐 내전은 전쟁 경험의 신화가 좌파 세력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한편 2차대전 때는 나치 무장친위대에 우파 버전의 ‘국제여단’이 만들어져, 서유럽에서 약 12만 5,000명, 동유럽과 러시아 등에서 약 20만 명이 무장친위대에 자원입대했다. 하지만 2차대전은 영상매체의 발달과 더불어 사실적인 전쟁 보도가 널리 확산되었기에 더는 전쟁의 실상을 은폐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는 이후 전쟁 경험 신화가 쇠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료: Fallen Soldiers, 저자 George L. Mosse김상호 기자 webeconom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