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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언어와 한글기획 전문가 칼럼] 정형기 교수, '한글' 이름 지은 주시경 선생과 말모이

"뜻있는 선열들이 목숨 바쳐
지키고 다듬은 우리말 우리글"

주시경의 꿈은 ‘우리말 사전’
사후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성과

"소리 하나, 글자 한 획
소중하지 않은 것 없어
고이 길이 간직해여"

 

[정형기 칼럼니스트/영산대 창조인재대학 자문교수] 한글을 만든 분은 세종대왕이지만, 이름을 지은 이는 주시경 선생이다. 1443년 창제되고 1446년 반포했을 때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거룩한 뜻이지만, 시간이 지나며 양반 아닌 평민이 쓴다고 ‘언문(諺文)’, 부녀자들이 쓴다고 ‘암클’이라 낮춰 불렸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국문’이라 부르며 모든 법령의 바탕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혼용하도록 했다.

 

한힌샘(크고 흰 샘) 주시경이 1913년 ‘한글’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일본에 강제 합병된 지 3년 지난 때였다. ‘배달 말글’이라 부르고 ‘한나라 글’로 쓰던 이름을 줄여서 한글이라 칭했다. ‘한’에는 ‘크다, 바르다’라는 뜻도 있다.

 

주시경은 1876년생이다. 그 시절 학동들이 그랬듯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당시 교육은 천자문, 소학 등 교본을 소리 내 읽으며 달달 외게 한 뒤 우리말로 무슨 뜻인지 가르치는 식이었다. 예컨대 논어 학이(學而)편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를 왼 후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뜻풀이를 하는데, 그는 아이들이 우리말 단계에 와서야 알아듣는 것을 보고 ‘중국 글과 우리말은 다르다’ 생각하고 국어 연구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94년 배재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접했고 1896년 <독립신문> 출간 때는 최초의 국어연구회인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창립했다. 서재필 등이 주도한 독립협회에도 참여했고, 청년 이승만이 고종 퇴위 음모에 연루되어 한성 감옥에 갇혔을 때 탈옥을 돕기 위해 육혈포 권총을 몰래 넣어주기도 했다. <제국신문>에 글을 썼고 메리 스크랜튼이 설립한 이화학당에서 가르쳤다. 남다른 학구열로 국어뿐 아니라 수학과 지리학도 공부하고 강의했다. 천재성과 성실함을 함께 갖춘 이 국어학자는 보자기에 책을 싸 들고 다녔는데 그래서 별명이 ‘주 보따리’였다.

그는 이미 1897년 독립신문 논설 「국문론」에서 한자 폐지와 국문 전용, 문법 정리와 철자법 통일을 제시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도 주장했다.

 

주시경의 꿈은 ‘우리말 사전’이었다. 겨레의 혼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말을 지켜야 하고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 말글로 된 옥편(사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11년 제자들과 조선어 사전 편찬을 계획하는데 이때 붙인 우리말 사전 이름이 ‘말모이’였다.

 

하지만 이 작업은 4년 만에 중단된다. 1914년 한국어 음운론 연구의 기틀을 다진 필생의 역작 <말의 소리>를 남겼지만, 그해 여름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다 서른아홉 젊은 나이로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김두봉, 권덕규, 신명균, 장지영 등 스승의 빈 자리를 채워가던 제자들은 1921년 조선어학회를 창립했고 1929년에는 각계 인사 108명이 참여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이 집대성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남한과 북한 현재 언어 규범의 모태가 되었다.

 

1933년 10월 「한글 맞춤법 통일안」,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1941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 등 우리 겨레 말글 3대 규범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1940년대 ‘국어(일본어) 상용’을 내세우며 조선어 말살에 나선 일제 총독부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관련자들을 검거, 구금, 고문했다. 이윤재, 한징은 옥사했고 주시경의 꿈도 좌절됐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우리 말글도 해방됐다.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도 출옥했다. 이들은 8월 20일부터 조선어학회 활동을 재개해 첫 한글 교과서 「한글 첫걸음」을 편찬했고, 12년이 지난 1957년에는 총 6권의 「큰사전」도 완성됐다.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은 언어를 단순한 의사 표현 수단 아닌 겨레의 얼과 혼을 담는 그릇으로 생각했다. 이들이 우리말 사전을 만들려 애쓴 뜻은 1919년 3.1운동을 일으킨 기미독립선언과 다를 바 없다.

 

“말(言)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느니라.”

 

말의 품격을 높이면 나라의 격도 높아지고, 말의 격이 떨어지면 국격도 낮아진다.


동서고금에 타당한 이치다.

 

뜻있는 선열들이 목숨 바쳐 지키고 다듬은 우리말 우리글이다. 


소리 하나, 글자 한 획 소중하지 않은 것 없으니 고이 길이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 정형기 칼럼니스트(영산대학교 창조인재대학 자문교수)는 경남고·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7·18·20·21대 국회 보좌관으로 국정의 한 축을 맡아왔다. 아울러 국회 최초 온라인 미디어 <국회ON> 선임기자, 매체 <빅터뉴스> 편집장으로 언론에 종사했고 공교육살리기시민연합, 대한민국감사국민위원회 등 시민단체 활동 이력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