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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용어, 이젠 우리말로] 정형기 교수 "위대한 한글 문자 가졌지만 한자 교육은 필요"...기하(幾何)를 ‘몇 어찌’라 불러야 하나?

"이미 한자(韓字)가 된 한자(漢字)를
버리지 말고 우리 것으로 삼자"

‘외래어’ 대부분인 한자말도 '우리말'

"오래전부터 우리말인 한자말 뜻을
올바르게 깨닫고 잘 쓸 수 있게 하는
교육을 지향(指向)해야"

 

[정형기 칼럼니스트/영산대학교 창조인재대학 자문교수] 20여 년 전 유럽 여행을 마치고 귀국할 무렵.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김밥과 튜브형 고추장으로 허기와 지친 입맛을 달래고 있는데, 옆에 앉은 이방인 여성이 신기한 듯 쳐다본다. 맛이라도 보겠나 묻고 한입 건네니 맵지도 않은지 고추장 바른 김밥을 잘 먹는다. 

 

호기심이 발동해 “This food is called Kimbap.” 하고는 종이에 한글로 “김밥”이라 써줬다. 갸우뚱하면서도 관심을 보인다. 대영박물관 한국관에서 훈민정음 병풍을 보며 한글을 ‘그리고’ 있던 아이들을 본 터다. 우리 글자를 한번 가르쳐 볼까?


들고 다니던 수첩에 한글 자음 ㄱ부터 ㅎ까지, 모음 ㅏ부터 ㅣ까지 쓰고는 그 아래 알파벳 발음기호를 달아주고 몇 단어를 써서 읽어보라 했다. “kimbap”, “kochujang” 하며 바로 읽는다. 오! 한글의 위대함이여.

 

세종대왕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어리석은 백성을 가엾이 여겨’ 만들었다는 스물여덟 글자. 집현전 학사이자 예조판서였던 정인지가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해하고,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고 소개한 쉬운 문자. 한글이다.

 

유엔 세계문화유산에 유일하게 문자 유산으로 채택된 한글은, 어떤 외국인이든 8시간만 배우면 자기 이름을 쓸 수 있다 한다. 고유의 말은 있어도 문자가 없던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은 한글을 공식 문자로 받아들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세종 25년 12월 30일(1443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일렀다”

 

글자 만든 원리부터 독특하다.


자음은 혀[舌], 입술[脣], 이[齒], 목구멍[喉] 등 사람의 발성기관 모양을 따서 만들었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은 모양, ㄴ은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습, ㅁ은 입술을 닫는 모양, ㅅ은 이 사이에 바람을 불어 넣는 모습, ㅇ은 목구멍 모양을 형상화했다. 기본 다섯 자음에 획을 더해 ㅋ ㄷ ㄹ ㅌ ㅂ ㅍ ㅈ ㅊ ㅎ이 나왔다.


모음은 철학적이다. 하늘에 뜬 해 모양을 본뜬 ㆍ, 평평한 땅을 나타낸 ㅡ, 사람을 형상화한 ㅣ. 우주와 그 안의 사람(天地人)이 글자를 구성하는 질료라니 놀랍지 않은가!

 

한글은 24개 음소로 거의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 


인공지능(AI), 챗GPT로 대표되는 디지털 생태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문자다. A~Z 26개 음소에 대문자 소문자를 구별하는 알파벳보다 컴퓨터 자판 입력이 훨씬 쉽다. 알파벳이나 가나(かな)를 입력해 해당 한자를 찾아야 하는 중국어나 일본어에 비할 바 없이 빠르고 효율적이다.

 

영국의 문화학자 존 맨은 “한글은 문자가 발달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인지 보여주는 최고의 알파벳”이라 극찬했다.


알브레히트 후베 독일 본 대학교 한국어 번역학과 교수는 한글에 담긴 음양오행 원리를 ‘우주론적 이진법’이라 언급하며 “라이프니츠(독일의 세계적 수학자이자 철학자)가 이진법으로 ‘컴퓨터의 아버지’라 불린다면, 그보다 250년 앞선 세종대왕은 ‘컴퓨터의 큰아버지’”라고 강조했다. 세종대왕이 완벽하게 디지털화한, 온 우주가 담겨 있는 문자를 최초로 창조했다는 것이다.

 

한글이라는 위대한 문자를 가졌음에도 한자 교육은 필요하다. 왜 그럴까?

 

한글은 우리말을 표기하는 우리글이다. 하지만, 우리말을 문자로 표현하는 방법일 뿐 우리말 자체는 아니다. 

 

우리말에는 오래전부터 쓰던 ‘순우리말’도 있고, 전쟁과 평화를 넘나들며 들어와 정착한 ‘외래어’도 있다. 빵, 담배, 고무, 구두가 포르투갈, 네덜란드에서 일본을 거쳐 들어온 말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외래어’ 대부분은 한자말이다.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國家), 사회(社會), 회사(會社), 정치(政治), 경제(經濟), 교육(敎育), 문화(文化) 등 우리가 아무 저항 없이 쓰고 있는 말들이 사실은 일본이 19세기 중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며 서양말을 한자말로 바꾼 용어다.

 

학교 현장에서 쓰는 교육 용어도 마찬가지다.

 

수학을 어려워하는 아이들 대부분은 풀이에 들어가기도 전 문제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좌절한다. 기하(幾何)니 정수(整數)니 대분수(帶分數)니, 최소공약수(最小公約數)니 최소공배수(最小公倍數)니, 소수(素數)니 동류항(同類項)이니 해석이 안 되는 용어 천지니 수학인지 한자 공부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미분(微分) 적분(積分) 등 수학지식이 필요한 경제학으로 들어가면 더하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의 ‘한계(限界)’가 limit(제한) 아닌 margin(증가분)임을, ‘체감’이 體感(몸으로 느낌) 아닌 遞減(차례차례 덜어감)임을 모르고 이 용어를 어찌 이해할 것인가? 미분은 ‘미세하게 나눈다’, 적분은 ‘미세하게 나눈 것을 쌓는다’는 뜻이다. 한자 뜻을 알면 어렵던 수학도 훨씬 쉬워진다. 

 

‘기하’를 ‘몇 어찌’라 부른다고 그 의미가 더 잘 전달될 리 없다. ‘1과 자기 자신만으로 나눠떨어지는 1보다 큰 양의 정수’라는 뜻인 ‘소수’(素數)를 풀어 쓴 용어로 바꿔본들 바꾼 말 익히느라 시간과 노력이 또 들 것이다.

 

한국사도 마찬가지다. 


타제석기(打製石器)를 뗀석기, 마제석기(磨製石器)를 간석기, 즐문토기(櫛文土器)를 빗살무늬 토기, 무문토기(無文土器)를 민무늬토기로 바꾼 교과서 개편을 하긴 했지만 석기(石器)니 토기(土器)라는 용어 자체가 한자말 아닌가. 뗀돌그릇, 간돌그릇, 빗살무늬흙그릇, 민무늬흙그릇으로까지 안 바꾼 건 왜인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할 때 시대(時代)를 ‘때’로 바꾼다고 그 말맛(nuance)이 그대로 전달될까?

 

잊힌 순우리말을 찾고 가꾸어야겠지만, 이미 널리 쓰고 있는 한자말이라면 그 뜻을 배우고 익혀 쓰게 하는 것이 낫다. 한국사는 우리 겨레가 나라를 만들고 살아온 자취를 배우고 익혀 오늘날 함께 사는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 과목이기에 더욱 그렇다.

 

어려운 한자말을 한글로만 쓰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니 무작정 외게 된다. 한자는 뜻글자, 한글은 소리글자다. 소리글자만으로는 뜻 전달에 한계가 있다. 찌아찌아어를 한글로 표기한다고 우리나라 사람이 해독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흘이 왜 4일이 아니라 3일이냐?” 묻거나, 말과 글을 다루는 기자조차 “무운(武運)을 빈다”는 말을 ‘운이 없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알아듣게 만드는 교육을 지양(止揚)하고, 어차피 우리말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자말 뜻을 올바르게 깨닫고 잘 쓸 수 있게 하는 교육을 지향(指向)해야 한다.

 

선대의 지식과 정보는 교육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후대에 전승된다. 교육은 문자를 통한 독서, 음성을 통한 강의로 이루어진다. 

 

이미 한자(韓字)가 된 한자(漢字)를 버리지 말고 우리 것으로 삼자. 서양 아이들이 자신들 나라말의 시조 격인 라틴어를 학습하듯, 우리 아이들에게도 기본적인 한자는 익히게 해서 배움에 어려움이 없도록 하자.

 

# 정형기 칼럼니스트(영산대학교 창조인재대학 자문교수)는 경남고·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7·18·20·21대 국회 보좌관으로 국정의 한 축을 맡아왔다. 아울러 국회 최초 온라인 미디어 <국회ON> 선임기자, 매체 <빅터뉴스> 편집장으로 언론에 종사했고 공교육살리기시민연합, 대한민국감사국민위원회 등 시민단체 활동 이력도 갖고 있다.